김흥경 (조선)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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1. 개요
김흥경은 조선 시대의 문신으로, 1699년 문과에 급제하여 설서로 관직 생활을 시작했다. 그는 사서, 정언 등 삼사의 청요직을 거쳐 대사간, 도승지, 충청도 관찰사, 이조 참판 등을 역임했다. 경종과 영조 시대에 걸쳐 활동하며, 영조 즉위 후에는 도승지, 예조 판서, 이조 판서, 우참찬 등을 지냈다. 1728년 이인좌의 난 진압 후 분무원종공신 1등에 책록되었으며, 이후 우의정과 영의정을 거쳐 판중추부사, 영중추부사를 역임했다. 아들 김한신이 영조의 딸 화순옹주와 혼인하여 왕실과 사돈 관계를 맺었으며, 그의 6촌 김선경의 손녀가 영조의 계비 정순왕후가 되면서 이중 인척 관계를 형성했다.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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조선 중기의 문신이자 소설가인 김만중은 명문 양반 가문 출신으로, 암행어사, 공조 판서, 대사헌, 대제학 등 요직을 역임하며 숙종의 궁녀 장씨 총애를 비판하다 유배 생활을 했고, 어머니를 위해 지은 『구운몽』과 『사씨남정기』를 비롯한 저서를 통해 국어 문학 발전에 기여하며 주자학적 세계관과 불교적 사상을 융합한 문학적 성취를 이루었다. - 노론 - 김수항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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김흥경 (조선) | |
---|---|
기본 정보 | |
![]() | |
이름 | 김흥경(金興慶) |
자 | 경여(景餘) |
호 | 창주(滄洲) 만뢰(萬瀨) |
본관 | (구)안동 김씨 |
생몰년 | 1748년 ~ 1818년 |
가족 관계 | |
아버지 | 김상철(金相喆) |
어머니 | 정부인 남양 홍씨 |
배우자 | 정부인 평산 신씨 |
아들 | 김재원(金載元) |
관력 | |
주요 관직 | 예조판서 공조판서 형조판서 한성부판윤 대사헌 동지사 지경연사 지성균관사 도총관 |
2. 생애
1699년 정시 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여 설서로 임명되고 10년 동안 사서·정언·부수찬·수찬·부교리·사간·집의·응교 등 삼사의 청요직을 지냈다.[1] 이후 승정원 승지, 사간원 대사간 등을 지냈다.[2]
1712년 대사간을 역임하고 도승지, 충청도 관찰사, 경기도 관찰사, 사헌부 대사헌, 이조 참판 등을 지냈다.[1] 1721년에는 대사성으로 후진 양성에 노력하였다.[1] 경종 때 한성부 우윤을 지냈다.[2] 신임사화 당시 신병을 이유로 사직했다가, 예조 참판, 도승지 등을 역임하고 한성부 우윤에 임명되었으나 민진원을 구원하다 파직되었다.[1]
1724년 영조가 즉위하자 승정원 도승지가 되었다.[2] 1725년 예조 참판, 호조 판서, 대사헌을 거쳐 음력 4월에 우참찬으로 동지사가 되어 청에 다녀왔다.[1][2] 그 뒤 예조판서, 이조 판서 겸 내국 제조(內局提調)를 거쳐 음력 7월 판의금이 됐다.[1]
1727년 한성부 판윤에 임명되었으나 신병으로 사퇴했다.[1] 같은 해 음력 4월 좌참찬에 임명되었으나,[1] 영조의 탕평책에 반대했다가 해임되었다.[2] 곧 복직되어 우참찬, 판의금, 좌참찬 등을 역임했다. 1728년 다시 도승지에 임명되었으나 신병을 이유로 사직했다가, 다시 우참찬, 판의금 등을 역임했다.[1] 1728년 이인좌의 난 진압 직후 분무원종공신 1등(奮武原從功臣一等)에 책록되었다.
1731년 음력 11월 다시 이조판서로 임명되었으나 이듬해까지 신병을 이유로 조정에 나오지 않다가 영조의 노여움을 사 황해감사(黃海監司)로 전출되었다.[1] 다시 기용되어 우의정, 영의정에 이르렀다.[2]
그 뒤 판중추부사(判中樞府事) · 영중추부사(領中樞府事)로 치사(致仕)한 뒤 봉조하(奉朝賀)가 되었다.[1]
아들 김한신이 영조의 딸 화순옹주의 부마가 되어 영조와 사돈간이 되었다.[1] 그런데 그의 6촌인 김선경의 손녀이자 김한구의 딸이 뒤에 영조의 계비 정순왕후가 되면서, 왕실과 이중 인척간이 되었다.
2. 1. 초기 관직 생활 (1699년 ~ 1720년)
1699년 정시 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여 설서로 임명되고 10년 동안 사서·정언·부수찬·수찬·부교리·사간·집의·응교 등 삼사의 청요직을 지냈다.[1] 이후 승정원 승지, 사간원 대사간 등을 지냈다.[2]2. 2. 경종 대의 활동 (1721년 ~ 1724년)
1712년 대사간을 역임하고 도승지, 충청도 관찰사, 경기도 관찰사, 사헌부 대사헌, 이조 참판 등을 지냈다.[1] 1721년에는 대사성으로 후진 양성에 노력하였다.[1] 경종 때 한성부 우윤을 지냈다.[2]신임사화 당시 신병을 이유로 사직했다가, 예조 참판, 도승지 등을 역임하고 한성부 우윤에 임명되었으나 민진원을 구원하다 파직되었다.[1]
2. 3. 영조 대의 활동과 탕평책 (1724년 ~ 1750년)
1724년 영조가 즉위하자 승정원 도승지가 되었다.[2] 1725년 예조 참판, 호조 판서, 대사헌을 거쳐 음력 4월에 우참찬으로 동지사가 되어 청에 다녀왔다.[1][2] 그 뒤 예조판서, 이조 판서 겸 내국 제조(內局提調)를 거쳐 음력 7월 판의금이 됐다.[1]1727년 한성부 판윤에 임명되었으나 신병으로 사퇴했다.[1] 같은 해 음력 4월 좌참찬에 임명되었으나,[1] 영조의 탕평책에 반대했다가 해임되었다.[2] 곧 복직되어 우참찬, 판의금, 좌참찬 등을 역임했다. 1728년 다시 도승지에 임명되었으나 신병을 이유로 사직했다가, 다시 우참찬, 판의금 등을 역임했다.[1] 1728년 이인좌의 난 진압 직후 분무원종공신 1등(奮武原從功臣一等)에 책록되었다.
1731년 음력 11월 다시 이조판서로 임명되었으나 이듬해까지 신병을 이유로 조정에 나오지 않다가 영조의 노여움을 사 황해감사(黃海監司)로 전출되었다.[1] 다시 기용되어 우의정, 영의정에 이르렀다.[2]
3. 가족 관계
4. 평가
5. 기타
5. 1. 이중 인척 관계
김흥경의 아들 김한신은 영조의 딸 화순옹주와 혼인하여 왕실과 사돈 관계를 맺었다. 6촌 김선경의 손녀이자 김한구의 딸이 영조의 계비 정순왕후가 되면서, 왕실과 이중 인척 관계를 형성했다.참조
[1]
웹인용
서울六百年史 - 김흥경(金興慶)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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2008-07-18
[2]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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경주김씨(慶州金氏)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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